
로마 제국 시대 에베소와 서머나는 무엇을 두고 경쟁했을까? 사도행전 19장에는 바울의 선교로 인해 에베소에서 소동이 일어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은장색 데메드리오와 장인들이 아르테미스 신전의 명예가 훼손될 것을 우려하며 시민들을 선동하자 수많은 사람이 극장에 모여들었다. 소동을 진정시킨 서기장은 에베소가 위대한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전지기'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한다(행 19:35). 여기서 신전지기로 번역된 그리스어가 '네오코로스'(νεωκόρος)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이후 로마 황제의 신전을 관리하는 도시가 자랑하던 명예로운 칭호가 되었다. 더욱이 에베소와 서머나는 이 칭호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수호자를 의미하던 네오코로스가 어떻게 로마 황제 숭배의 중심도시를 나타내는 칭호가 되었을까? 이 질문은 두 도시의 역사는 물론 로마 제국 시대 소아시아의 정치와 종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두 항구도시, 로마 제국의 명예를 다투다
오늘날 튀르키예 서부의 에게해 연안에 자리한 에베소(Ephesos)와 서머나(Smyrna)는 고대 이오니아 지역을 대표하는 항구도시였다. 에베소는 카이스테르강(Kaystros) 하구에 형성된 항구를 통해 아나톨리아 내륙과 지중해 세계를 연결했다. 내륙에서 생산된 물자가 에베소를 통해 에게해로 나아갔으며, 로마와 그리스 세계에서 들어온 사람과 물자는 다시 내륙으로 이동했다. 반면 서머나는 에게해의 깊숙한 만을 중심으로 발전한 항구도시로, 오늘날 이즈미르(İzmir)로 이어지고 있다. 에베소가 아시아 속주의 대표적인 행정·상업 중심지로 성장했다면, 서머나는 로마와의 오랜 우호 관계를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두 도시는 지리적으로 가까웠으며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명성에서도 서로 경쟁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경쟁이 본격화된 배경에는 로마의 소아시아 지배가 있었다. 주전 133년 버가모 왕국의 마지막 왕 아탈로스 3세(Attalos III)는 자신의 왕국을 로마에 유증했다. 그러나 아리스토니코스(Aristonikos)가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키면서 로마의 통치는 곧바로 안정되지 못했다. 주전 129년을 전후하여 로마는 이 지역에 아시아 속주(Provincia Asia)를 정비했고, 서부 아나톨리아의 여러 도시는 새로운 정치질서 안으로 편입되었다. 로마는 그리스 도시들의 전통적인 시민공동체와 자치제도를 상당 부분 유지하면서 속주를 통치했다. 이에 따라 도시들은 로마의 권위에 순응하는 동시에 황제와 원로원의 신임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 도시가 아시아의 '첫째 도시'(πρώτη πόλις)인가, 어느 도시가 '메트로폴리스'(μητρόπολις), 곧 중심도시의 지위를 누리는가는 중요한 경쟁의 대상이 되었다. 역사학자 스뱌토슬라프 드미트리예프(Sviatoslav Dmitriev)는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 소아시아의 도시 행정』(City Government in Hellenistic and Roman Asia Minor, 2005)에서 이러한 명예 칭호와 도시 정치의 관계를 설명한다. 로마 시대 소아시아의 도시들은 제국의 통치 아래 놓여 있었지만, 그 안에서 더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한 경쟁을 멈추지 않았다.
도시의 정치적 경쟁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은 로마 황제 숭배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후 소아시아의 도시들은 황제와 로마 국가를 위한 신전을 건립하고, 황제의 이름으로 제의와 축제, 경기대회를 개최하면서 제국에 대한 충성을 나타냈다. 이러한 전통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서머나였다. 서머나는 이미 주전 195년 로마를 의인화한 여신 로마(Dea Roma)를 위한 신전을 세웠다. 당시는 로마가 지중해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제국으로 성장하기 이전이었다. 이어 주전 29년에는 버가모가 로마 여신과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속주 차원의 신전을 건립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황제 숭배는 이렇게 그리스 도시들의 전통적인 종교와 결합하면서 속주 전체의 공적 제도로 발전했다. 고대 종교사 연구자인 사이먼 프라이스(Simon Price)는 『소아시아의 권력과 의례』(Rituals and Power, 1984)에서 황제 숭배를 로마 제국의 권력과 지역 도시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의례적 질서로 분석했다. 어느 도시가 황제 숭배의 중심지가 되는가는 단순한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로마 제국 안에서 누리는 정치적 명예와 권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네오코로스 — 신전지기에서 도시의 명예로
그렇다면 네오코로스는 어떤 의미를 지닌 말이었을까? '네오코로스'(νεωκόρος)는 신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네오스'(νεώς)와 청소하거나 돌본다는 의미의 동사 '코레오'(κορέω)에서 유래한 말로, 본래 신전을 관리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그러나 이 표현은 점차 신전의 수호와 관리에 책임을 지는 도시공동체를 나타내는 의미로 확대되었다. 사도행전 19장 35절에는 '텐 에페시온 폴린 네오코론 우산'(τὴν Ἐφεσίων πόλιν νεωκόρον οὖσαν)이라는 구문이 등장한다. '에베소 사람들의 도시'를 뜻하는 '텐 에페시온 폴린'에 네오코로스의 목적격 형태인 '네오코론'(νεωκόρον)이 연결되고, 여기에 여성 단수 목적격 현재분사 '우산'(οὖσαν)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구문은 에베소라는 도시 자체가 신전의 수호자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서기장이 주장한 것은 시민 가운데 누군가가 신전을 관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에베소라는 도시공동체 전체가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기는 특별한 도시라는 것이었다.
에베소 시민들에게 아르테미스 신전은 도시의 종교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었다. 고대 세계의 일곱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아르테미스 신전은 그리스의 일반적인 아르테미스 신앙과 소아시아의 오랜 지역 종교가 결합된 성소였다. 도시 외곽에 자리한 거대한 신전에는 여러 지역에서 순례자와 방문객이 찾아왔고, 제의와 축제, 봉헌물의 제작과 거래가 이루어졌다. 신전은 막대한 재산이 집중되는 경제적 중심지이기도 했다. 사도행전 19장 24–27절에서 데메드리오가 은으로 아르테미스 신전 모형을 제작하는 장인들의 수입을 문제 삼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바울의 가르침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있으며, 그 결과 자신들의 생업뿐 아니라 아르테미스 신전의 명예까지 위협받는다고 주장했다. 에베소에서 종교적 신앙과 경제적 이해관계, 시민의 자부심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관계는 에베소 대극장에서 벌어진 소동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누가는 군중이 약 두 시간 동안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외쳤다고 기록한다(행 19:34). 그들을 진정시킨 서기장은 에베소의 종교적 명예를 확인한 뒤, 데메드리오와 장인들에게 정식 재판 절차를 이용하라고 권했다. 특히 이번 소동 때문에 로마 당국으로부터 불법 집회에 대한 책임을 추궁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행 19:35–40). 이 장면은 도시의 종교적 자부심조차 로마 제국의 법과 공공질서 안에서 유지되어야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신약학자 슈테판 비테체크(Stephan Witetschek)는 사도행전 19장 35절의 네오코로스가 에베소의 도시 칭호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설명한다(Artemis and Asiarchs, 2009)). 다만 바울이 활동하던 주후 50년대에 아르테미스 신전의 수호자를 의미했던 표현과 이후 황제 숭배와 관련하여 공식적으로 사용된 네오코로스 칭호는 구분해야 한다. 그럼에도 같은 단어가 도시의 종교적 명예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에베소의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서머나의 승리 — 황제 신전 건립권을 둘러싼 경쟁
주후 26년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는 황제 신전의 건립권을 둘러싼 도시들의 경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아시아 속주의 열한 도시가 티베리우스를 위한 신전 건립의 영예를 얻으려고 경쟁했다고 기록한다(Annales 4.55–56). 그 가운데는 에베소와 서머나, 버가모, 사데, 밀레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각 도시의 사절단은 로마 원로원에 자신들의 역사적 전통과 정치적 충성, 경제적 능력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미 아우구스투스의 신전을 보유하고 있던 버가모는 충분한 명예를 누렸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에베소와 밀레도 역시 각각 아르테미스와 아폴론 숭배의 중심도시라는 점이 고려되었다. 결국 마지막 경쟁은 사데와 서머나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이 사건은 황제 신전의 건립권이 로마 원로원의 결정에 따라 도시의 정치적 위상이 달라지는 중요한 사안이었음을 보여 준다.
서머나의 사절단은 자신들의 오랜 친로마적 전통을 강조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서머나 사람들은 로마가 아직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하기 이전부터 로마 여신을 위한 신전을 건립했다는 사실을 내세웠다. 또한 로마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군함을 제공했던 일과 로마군이 혹독한 겨울을 보내며 의복이 부족했을 때 서머나 시민들이 자신들의 옷을 벗어 군대에 보냈던 사건을 소개했다. 반면 사데는 리디아와 에트루리아의 역사적 관계, 풍요로운 자연환경과 오래된 도시의 전통을 강조했다. 로마 원로원은 최종적으로 서머나를 선택했다. 그 결과 서머나는 티베리우스와 그의 어머니 리비아, 로마 원로원을 위한 속주 차원의 신전을 건립할 수 있게 되었다. 서머나가 경쟁에서 승리한 중요한 이유는 로마에 대한 오랜 충성과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역사적 기억이었다. 황제 신전을 얻기 위한 경쟁에서 도시의 과거가 현재의 정치적 자산으로 사용된 것이다.
서머나가 획득한 명예는 주화에서도 확인된다. 티베리우스 시대에 발행된 서머나의 주화에는 리비아와 로마 원로원을 상징하는 인물이 등장하며, 반대편에는 신전 안에 서 있는 티베리우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로마 속주 주화 목록』(Roman Provincial Coinage, RPC I, 2469)에 수록된 주후 29–35년의 주화가 대표적인 사례다. 주화는 도시가 일상적인 경제활동에서 사용하는 화폐인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위상과 종교적 명예를 널리 알리는 매체였다. 황제의 초상과 신전의 모습, 도시의 칭호가 새겨진 화폐는 도시의 정체성을 제국의 여러 지역에 전달했다. 서머나가 티베리우스 신전의 건립권을 획득한 사건은 이후 첫 번째 황제 숭배 네오코로스의 영예를 얻은 역사로 이해되었다. 다만 주후 26년에 이미 후대의 네오코로스 칭호 체계가 완성되어 있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바버라 버렐(Barbara Burrell)은 『네오코로이: 그리스 도시들과 로마 황제들』(Neokoroi: Greek Cities and Roman Emperors, 2004)에서 비문과 주화, 황제 신전의 역사를 통해 이러한 칭호가 로마 제국 동부 도시들의 정치적 경쟁 속에서 발전한 과정을 설명한다. 서머나의 승리는 황제 신전의 건립권이 도시의 명예와 권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에베소의 도전 — 두 번, 세 번의 네오코로스
주후 26년의 경쟁에서 서머나가 승리했다고 해서 에베소가 로마 제국 안에서 차지하던 중요성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에베소는 뛰어난 항구와 도로망을 바탕으로 아시아 속주의 대표적인 행정·상업 중심지로 성장했고, 아르테미스 신전은 여전히 지중해 세계에서 높은 명성을 누렸다. 그러나 에베소 역시 황제 숭배를 통해 도시의 정치적 지위를 더욱 강화하고자 했다. 마침내 주후 89–90년경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플라비우스 황실을 위한 속주 차원의 신전이 건립되면서 에베소는 황제 숭배와 관련된 네오코로스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오늘날 도미티아누스 신전으로 불리는 유적이 이러한 역사를 전한다. 다만 이 신전은 도미티아누스 개인만을 위한 성소라기보다 플라비우스 황실의 황제들을 위한 '세바스토이'(Σεβαστοί) 신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에베소에서 발견된 비문(I.Ephesos 233)에는 도미티아누스가 에베소에 네오코로스의 영예를 부여한 일을 기념하는 내용이 남아 있다. 이로써 에베소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도시라는 오랜 명성에 황제 숭배의 중심도시라는 새로운 영예를 더하게 되었다.
에베소와 서머나의 경쟁은 주후 2세기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더욱 치열해졌다. 서머나는 당시 유명한 수사학자 안토니우스 폴레몬(Antonius Polemon)을 통해 황제의 후원을 얻었으며, 주후 123–124년경 두 번째 네오코로스의 지위를 획득했다. 필로스트라토스(Philostratos)는 『소피스트 열전』(Vitae Sophistarum 1.25)에서 폴레몬이 하드리아누스와 맺은 관계와 황제로부터 받은 막대한 지원을 소개한다. 이러한 후원은 신전과 체육시설, 시장과 공공건축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에베소 역시 하드리아누스의 후원을 통해 두 번째 황제 숭배 네오코로스를 인정받았다. 주후 132년경 아테네에 세워진 하드리아누스의 상 기단 비문(SEG 33.179)은 에베소를 아시아의 첫째이자 가장 큰 메트로폴리스이며 '두 번의 네오코로스'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늘날 에베소의 쿠레테스 거리에 남아 있는 작은 하드리아누스 신전과 속주 차원의 황제 숭배 신전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후자는 일반적으로 항구 평야의 대규모 올림피에이온(Olympieion) 성소와 관련하여 논의된다.
네오코로스의 칭호가 중요한 이유는 그 횟수가 도시의 명예를 비교하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도시들은 자신들이 '두 번의 네오코로스'(δὶς νεωκόρος), '세 번의 네오코로스'(τρὶς νεωκόρος)라는 사실을 주화와 비문에 기록했다. 서머나는 주후 3세기 초 카라칼라 황제 시대에 세 번째 네오코로스의 영예를 획득했다. 그러나 에베소의 경우에는 칭호의 횟수를 계산하는 방식이 다소 복잡했다. 카라칼라 시대의 비문(I.Ephesos 300)에는 에베소가 세 번의 네오코로스이며, 그 가운데 두 번은 황제들에 관한 것이고 한 번은 아르테미스에 관한 것이라는 설명이 등장한다. 이는 에베소가 오랫동안 주장해 온 아르테미스 신전의 수호자라는 정체성을 공식적인 도시 칭호에도 포함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다만 아르테미스의 네오코로스가 황제 숭배 이전부터 공식적인 칭호로 인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비테체크는 관련 비문을 분석하면서 에베소가 아르테미스의 네오코로스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시기를 카라칼라 황제 시대와 연결한다. 이처럼 에베소에서는 오래된 지역 신앙과 로마 황제 숭배가 도시의 정치적 명예를 나타내는 하나의 칭호 체계 안에서 결합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에베소와 서머나는 왜 네오코로스의 지위를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을까? 황제 숭배 신전을 보유한다는 것은 로마 황제와 원로원으로부터 도시의 정치적 충성과 위상을 인정받았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 명예는 실제적인 경제적 이익과도 연결되었다. 속주 차원의 황제 제의와 축제, 경기대회가 열리면 여러 도시에서 사절과 관리, 선수와 방문객이 모여들었다. 이들의 방문은 숙박과 음식, 공예와 상업을 활성화했으며 신전과 경기시설을 건립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도시의 공공건축도 발전했다. 물론 이러한 사업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고, 도시의 유력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거나 공공시설을 후원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따라서 황제 숭배는 도시의 종교적 제도이면서 정치적 명예와 경제적 번영을 추구하는 수단이었다. 에베소와 서머나가 네오코로스의 칭호를 경쟁적으로 강조했던 이유는 바로 이처럼 제국의 권위와 도시의 이익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신전도시의 세계에서 초기 교회를 읽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사도행전과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에베소와 서머나를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바울이 활동하던 주후 1세기 중반의 에베소에서는 아르테미스 신전이 도시의 종교와 경제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사람들의 신앙과 생활에 변화를 일으키자 이러한 도시의 전통적인 질서와 갈등이 발생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은장색들의 반발이 대규모 소동으로 번진 것은 복음이 개인의 종교적 선택을 넘어 도시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시민적 정체성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에베소 대극장에서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문장을 직접 외쳤다고 사도행전이 기록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은 그가 전한 복음의 중심 고백이었다. 이러한 복음은 아르테미스 신앙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의 가치와 질서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에베소와 서머나는 황제 숭배가 더욱 발전하고 도시의 정치적 명예와 결합된 환경 속에 있었다. 요한계시록은 에베소 교회에 처음 사랑을 버린 문제를 지적하고(계 2:1–7), 서머나 교회에는 환난과 궁핍 가운데서도 충성할 것을 권면한다(계 2:8–11). 두 교회에 주어진 말씀은 서로 달랐지만, 그 배경에는 로마 제국의 권위와 전통적인 신앙이 도시의 공적 생활을 형성하던 세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겪었던 갈등과 박해를 황제 숭배에 대한 거부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서머나 교회에는 지역 유대인 공동체와의 갈등도 언급되며 로마 제국의 종교적·사회적 환경 역시 시대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훗날 서머나 감독 폴리카르포스(Polykarpos)의 순교 이야기는 제국의 권위와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어떻게 충돌할 수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폴리카르포스 순교록』 9–10장에 따르면 로마 총독은 폴리카르포스에게 황제의 운명을 두고 맹세하며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폴리카르포스는 오랫동안 섬겨 온 그리스도를 모독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 기록은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대보다 뒤의 상황을 전하지만, 서머나의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갔던 로마 제국의 종교적 환경을 이해하는 중요한 문헌이다. 도시의 시민들은 황제와 신전의 명예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정체성을 확인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도시에서 살아가면서도 궁극적인 충성의 대상을 다르게 이해했다. 신전도시의 역사 속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한 정체성은 바로 이러한 차이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에베소와 서머나의 역사는 로마 제국의 도시들이 무엇을 통해 자신의 명예와 정체성을 형성했는지를 보여 준다. 아르테미스 신전을 자랑하던 에베소와 로마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던 서머나는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에서 성장했지만, 황제 숭배라는 제국의 공통된 질서 안에서 네오코로스의 영예를 놓고 경쟁했다. 도시의 신전은 종교적 공간이면서 정치적 권위를 드러내는 장소였고, 황제의 이름으로 열리는 축제와 경기대회는 제국과 도시를 연결하는 공적 행사였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에베소와 서머나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형성되고 성장했다. 사도행전 19장 35절의 네오코로스라는 단어를 이해하면 에베소 대극장에서 벌어진 소동이 한 도시의 경제적·종교적 질서와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었는지 알게 된다. 또한 에베소와 서머나가 황제 신전의 건립권을 놓고 경쟁했던 역사를 살펴보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두 교회가 어떤 정치적·종교적 환경 속에 있었는지도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네오코로스라는 하나의 칭호에는 로마 제국의 권위와 도시의 명예, 신전의 경제적 가치와 시민공동체의 정체성이 함께 담겨 있었다. 아르테미스의 신전지기라는 자부심에서 황제 신전의 수호자라는 명예에 이르기까지, 네오코로스의 역사는 에베소와 서머나가 걸어온 서로 다른 길을 하나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만나게 한다. 이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때 성경 속 에베소와 서머나는 단순히 초기 교회가 세워졌던 장소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정치와 종교, 경제와 문화가 교차하던 구체적인 삶의 공간으로 다가온다.
김진산 터치바이블 사역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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